청라언덕에 봄이 오다
막바지 겨울 체온이 서서히 사라져가는 2월 하순경, 요란스럽게 울린 휴대폰 벨 소리 너
머로 아버님은 떨리는 목소리로 심한 복부 통증을 호소하며 동산의료원 응급실에 와있다
면서 빠른 조치를 원하는듯했다. 부리나케 병원으로 달려가니 응급실은 만원이었고 아버
님은 계속 복부 통증으로 고통스러워했고 CT 촬영 결과 담도에 돌이 박혀있어 이를 제거
하고 담낭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결론이 났다. 담낭 질환에 대해서 문외한 나는 의사와 간
호사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담석 제거보다 담낭 수술이 더 걱정 되어 가만있지 못하고
병원 실내를 목적 없이 빙빙 돌았다.
친구나 지인이 병원에 있으면 아무래도 그들을 찾는 게 인지상정인 것 같다. 병원 행정업
무를 맡은 친구와 외과의사 친구를 번갈아 만나서 질환에 대해 물어보니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담당 의사에게 전화를 걸어 치료를 잘해주라는 이야기까지 들으니 다소
안도가 되었다.
다만, 과거 심장질환으로 입원 진료한 적이 있어 고령에 담낭을 제거하는 수술이라 수술 전
까지 마음이 잡히질 않았다. 담낭수술 전날 삼일절에 아버님을 뵈러 집에서 도보로 한 시간
이십 여분 소요되는 병원까지 걸어갔다. 도심의 젖줄 신천 강변을 따라 물길과 같은 방향으
로 걷다가 작은 다리를 건너고 도회의 아파트 단지를 지나 반월당을 거쳐 동산병원까지 도보
행은 그리 지루하지 않았다.
사실 수술 전까지 병원에 계속 있어봐야 특별히 아버님에게도 별 도움도 안 되는 것 같아
봄이 오는 소리에 마음을 추스르며 신천에 흐르는 물처럼 시원스럽게 수술이 잘되기를 기원
했다.
생명이 살아 숨 쉬는 것은 모두 아름답다. 강변에 서 있는 나무에도 파란 기운이 싹트고
신천으로 흐르는 강물도 요란스럽게 울면서 흐른다. 물막이 보에서 낙하하는 물기둥이 하얀
실타래처럼 쏟아지며 겨울동안 이끼 낀 바닥을 세척하며 힘차게 흐른다.
고독한 도회의 겨울이 서서히 걷혀가는 듯 강변에는 운동하는 사람들로 화려하게 채색되고,
오리도 날개를 펴며 물 위에서 자멱질이 한창이다. 봄을 즐기는 자에게 봄은 저만치 왔건만
′春來不似春′ 하늘은 회색 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계산 오거리에서 동산의료원으로 가는 길은 보통 달구벌대로를 따라 서문시장역 네거리에서
우측으로 꺾어 서문시장 방면으로 가는 것이 대길이지만, 방송에서 익히 보아왔던 제일교회
옆 담벼락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 아무래도 지름길 같아 청라언덕을 거쳐 동산병원으로 방향
을 잡았다.
′청라언덕′은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를 쓰고 있는데, 이 ′청라′는 푸른 담쟁이로 뒤덮은
동산병원 내 선교사 사택 일대의 언덕을 말한다고 한다.
청라언덕으로 오르는 계단 옆 입구에는 역사를 탐구하려는 듯한 학생들이 제법 서 있었고, 어
떤 부자는 계단에서 서로 마주 보며 담벼락에 붙여진 삼일절 투쟁 사진을 보며 진지하게 이야
기하는 자도 보였다.
매일신문사 건너편 청라언덕으로 난생처음 올라가 봤다. 동산에 올라서니 시내가 잡힐듯하고
하늘에 닿을 듯 첨탑의 미를 자랑하는 제일교회와 100년 풍상을 겪은 의료선교원과 구한말 선
교 및 의술을 베풀었던 외국 선교사 집이 고색창연한 미소를 띠고 우뚝 솟아있다.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창과 세월에 녹아든 벽돌 위로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듯한 담쟁이넝쿨이
벽에 가로 혹은 세로로 단단히 실타래처럼 엮어져 청라언덕의 근, 현대사를 일깨워주는 듯하다.
의료선교 문화재 고택에 질기도록 붙은 담쟁이넝쿨은 청라언덕 주변이 대구의 근대 선교와 교육,
의료의 산파역으로 한 알의 밑거름 동산이 되었음을 오늘에도 말없이 대변해준다.
의료선교관 입구에는 서양 선교사가 가지고 온 수십 그루 사과나무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과
나무 한 그루가 보호수 역할을 하며, 마치 세월의 연륜에 어찌할 수 없는 노인처럼 호리호리한
모습으로 여러 개의 지팡이에 기댄 채 서 있다.
선교사 고택 사이에 박태준의 동무생각이 아로새겨진 노래비가 맞으편에 그의 사진과 일대기를
적은 커다란 판넬을 바라보며 동무생각이 소리없이 흘러나온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퍼지는
청라 언덕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나리 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 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때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더운 백사장에 밀려 들오는
저녁 조수 위에 흰새 뛸 적에
나는 멀리 산천 바라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저녁 조수와 같은 내 맘에 흰새 같은 내 동무야
내가 네게서 떠돌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소리없이 오는 눈발사이로
밤의 장안에서 가등 빛날 때
나는 높이 성궁 쳐다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부른다
밤의 장안과 같은 내 맘에 가등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빛날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의료선교원 터에서 동산의료원 방면으로 바라보면 비슷한 연륜을 자랑하는 계성 동산이
포근하게 마주하고 있다. 고색창연한 역사관이 마치 오랜 지기처럼 반가운 듯 양 언덕에
서 서로 위로하며 손짓하는듯하다.
문득 고등학교 때 1년간 자취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남산동 서현 교회 뒤편에서 자취할
때 등하교는 큰 도로를 따라 지금의 서문시장역 네거리를 따라 시계추처럼 한 치의 오차
도 없이 다녔다. 그 당시 낭만이라고는 계성 동산 안에서만 찾을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오늘 처음으로 청라언덕을 오르면서 계산오거리에서 모교로 가는 길이 있음을 알고 내심
탄식?을 해본다.
이렇게 아름다운 거리를 두고 학창시절에 허허벌판 같은 아스팔트 길로 다녔으니 무지로
아름다운 사춘기를 헛되이 보내지 않았는지 곱씹어본다. 자취방에서 계산 오거리를 지나
청라언덕을 따라 모교로 등교만 했어도 나의 청춘은 더욱 푸르고 아름다웠으리라 감히 상
상해본다. 아름다운 공간은 멀리 있는 게 아니며 제때 찾지 못할 따름이다.
봄이 오는 소리에 청라언덕도 꿈틀거린다. 카메라 셔터 소리. 선교사 고택 앞에 설치된 의
자에 앉아 웃음꽃을 터뜨리는 중년의 여자 서넛 어깨너머로 가는 햇살이 살포시 쏟아진다.
청라언덕 건너편에 손에 잡힐듯한 계성 동산 50계단에도 봄의 교향악이 빗발처럼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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